#정말 막 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부모님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대신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전폭적으로 밀어주셨다. 그게 공부가 아니라 미술, 체육 쪽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런 부모님의 지원 덕분이었다. 한국 전통 소리인 ‘창(唱)’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바람도 들어주셨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포기하는 두려움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미래의 모습을 고민해본 적이 없던 것은 당연했다. 시시때때로 하고 싶은 게 바뀌는 사람이 먼 미래를 그려봤을 리 없었다. 대학 진학 때도 그런 기질은 이어졌다. 수능 성적에 맞춰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지원 학교와 학과를 정해주셨다. 인생에서 첫 고민을 한 것은 대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였다. 꼬박 8년 후, 고민 한 번 해본 적 없던 철부지 대학생은 여러 직원을 이끌며 기업의 성장을 고민하는 어엿한 스타트업 대표로 변신했다. 커플의 건강한 연애를 돕는 어플리케이션인 ‘홀딱 바나나’를 만든 박민경 홀라 컴퍼니 대표의 이야기다.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홀딱바나나 투자설명회 진행하고 있는 박민경(왼쪽 첫번째) 홀라 컴퍼니 대표 /사진제공=박민경 대표 ◇전교 꼴찌에서 1등으로 박 대표는 포항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공부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공부 말고도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생각이 달라진 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서였다. 줄곧 바닥권이었던 성적 탓에 진학이 결정된 고등학교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문제는 반배치 고사였다. 총 13개 반이 있었는데 그 중 2반은 우등반, 11반은 열등반으로 나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열등반을 가기에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께 과외를 받고 싶다고 부탁 드렸다. 공부 말고도 하고 싶은 것을 말리지 않았던 부모님이었다. 공부하고 싶다는 딸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주셨다. 반 배치 고사를 보기 전 3개월 동안 박 대표는 평생 공부에 쏟았던 노력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박 대표는 우등반으로 배치됐다. “문제는 선생님들의 시선이었어요. 중학교 때 꼴찌가 우등반으로 배치됐으니 뭔가 잘못됐다는 눈초리였죠. 독기가 올랐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박 대표는 더 공부에 매진했다. 첫 중간고사 성적은 선생님들의 눈초리를 바꾸고도 남았다. 전교 1등을 한 것이다.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노는 박민경(오른쪽) 대표 /사진제공=박민경 ◇처음 맛본 사회의 달콤함 높은 성적의 보상은 컸다. 주변의 시선부터 전혀 달라졌다. 박 대표가 무엇을 하던 선생님들은 전교 1등이라는 면죄부를 줬다. 처음 맛본 사회의 달콤함이었다. “그 때도 인생의 고민은 크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죠. 성공하면 사회의 시선이 달라지는구나. 거기서 얻는 내 보람과 만족도도 엄청나구나.” 그렇게 서울 유학을 결정했다. 더 큰 곳에서의 성공을 원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 거주하던 이모님의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서울은 포항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전학한 송파구 영동여고(현 영동일고)에는 유학파 출신이 많았다. 다들 공부를 잘한 것은 물론이었다. 강남8학군으로 불리던 지역 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박 대표가 성적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약 포항에 그대로 남았으면 내신 전형으로 더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을 거에요. 후회는 없어요. 성적 대신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됐거든요.” ◇스킨스쿠버에 빠지다 박 대표는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건축설비공학과 04학번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정해준 데로 간 것이라 학과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스킨스쿠버 동아리 활동은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열심히 했다. “정말 ‘빡센’ 동아리였어요. 자칫 잘못하면 큰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취미인 만큼 동아리 내 위계질서가 강했죠. 군대라고 보시면 돼요.” 그만두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동아리 내 큰 행사인 9박10일 여름 MT를 다녀오면 동기들과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울릉도를 가서 아침마다 일어나 장비를 닦고, 안전교육을 받으면서 사람을 얻었다. 힘든 동아리 생활은 2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활동 자체는 익숙해졌고, 평생 갈 사람들도 얻었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휴학은 그렇게 특별한 이유 없이 결정했다. 2004년 대학 입학 후 박 대표는 스킨스쿠버 동아리 활동을 목숨 걸 정도로 열심히 했다. /사진제공=박민경 ◇허비한 2년, 고민의 시작 호주를 고른 데에도 별 생각이 없었다.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돼서 와야지’ 하는 거창한 목표도 없었다. 외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동여고로 전학 왔을 때 외국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친구들이 부러웠다. 한 번은 외국을 나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대학교 동기 친구와 함께 2년을 휴학했다. 1년 동안은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학연수 비용을 벌었고, 호주로 출발했다. 문제는 목표를 너무 일찍 달성했다는 점이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어학 반을 등록했는데 불과 1주일 만에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목표였어요. 외국인 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거죠. 어학 반에 들어가자 온통 외국인뿐이었고, 서울로 처음 전학 갔을 때보다 더 빨리 친해졌죠.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2007년 호주에서 어학연수하던 시절의 박 대표. 넉살좋고 활발한 성격 덕에 불과 일주일 만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친해졌다. /사진제공=박민경 1년을 잡고 온 어학연수였다. 친구는 만들었고, 이제는 영어 공부를 해야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1년 동안 영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박 대표가 들어갔던 어학 반은 하급 수준. 같은 반 외국인들은 박 대표보다 영어를 못하면 못했지 잘하진 않았다. 시험을 보면 기본적인 스펠링을 박 대표가 알려줘야 했을 정도였다. 대화는 주로 단어만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늘 틈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의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올 무렵, 박 대표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년의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복수전공을 해야겠다는 결정은 그렇게 하게 됐다. ◇산업디자인에서 기획을 공부하다 3학년부터 박 대표는 산업디자인학과를 복수전공 하기 시작했다. 건축설비공학과도 공부하기 힘든 학과였지만, 산업디자인학과는 더 심했다. 힘든 만큼 얻는 것은 컸다. 박 대표의 현재 모습은 당시의 경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디자인을 공부했다고 하면 기술적인 부분을 생각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디자인보다 ‘산업’이 학과 이름에 먼저 들어가 있는 데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물건을 기획하고 이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팔 수 있는지를 더 많이 배웠죠.” 대학 3학년 때 복수전공으로 산업디자인학과를 선택했다. 이 때 나온 작품 ‘원초적 본능’. 물건을 기획하고 이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팔 수 있을 지를 공부하면서 ‘홀딱 바나나’ 탄생의 영감을 얻었다. /사진제공=박민경 복수전공을 하면서 박 대표는 처음 창업을 생각하게 됐다. 다양한 사고로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만드는 방법론, 팀으로 일하는 기술, 사업을 기획하는 능력 등을 배우는 것은 적성에도 잘 맞았다. 취업도 그런 곳으로 하고 싶었다. 당시 막 뜨기 시작하던 스타트업이나 본인이 직접 기획을 할 수 있는 작은 회사를 알아봤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박봉이 첫 번째 문제였다. 이 돈을 받고 살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도 문제가 됐다. 주 전공이 건축설비공학과였던 박 대표를 회사 입장에서 기획자로 뽑을 이유는 없었다. 눈앞에 닥친 취업 문제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그렇듯, 박 대표도 닥치는 대로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를 뽑아준 것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설사였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2010년 한 대형건설사에 입사한 박 대표는 일에 잘 적응했다. 만 3년 정도를 근무하자 해외 건설 현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까지 찾아왔다. 건설사 직원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사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어요. 일에는 적응이 됐지만, 재미가 없었거든요. 꿈꿨던 창업을 해보고도 싶었죠. 그런데 해외 현장으로 가라는 지시가 났어요. 일단 가서 일해보고 결정하자고 생각했죠.” 박 대표는 그렇게 회사생활의 마지막 1년을 싱가포르의 현장에서 보냈다. 결과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더 쉬워졌다. 너무 힘들었던 탓이다. 아니, 힘든 것보다 개인적인 시간이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오전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매일 같이 현장에서 일을 했다. 주말도 없는 생활이었다. 1년 동안 이런 생활이 이어졌다. SK건설을 다니던 시절의 박 대표. 해외 건설 현장을 누비며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지만 박 대표는 그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진제공=박민경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사실 하루 14시간씩 일하면, 2년이면 1만 시간이잖아요. ‘왜 내가 이 시간을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며 보내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었죠. 보통 해외 현장에서는 3년을 지내야 하는데 저는 프로젝트 중간에 투입돼서 1년만 일하면 됐던 점은 다행이었어요.” 그의 결심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더 굳어졌다. 1년 동안의 파견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회사에서는 2주의 휴가를 줬다. 휴가 마지막 날에 박 대표는 청담동의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갔다. 기독교 신자인 그였지만, 그 때만큼은 사표 고민에 누구에게라도 기대보고 싶었다. 점쟁이는 뭐든 정말 잘 맞췄다.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백발백중이었다. 딱 하나, 박 대표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둬도 되냐고 물으니깐, 절대 안 된다는 거에요. 일단 더 다녀보라는 얘기였죠.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눈앞에서 용한 것을 확인했는데도 점쟁이 말을 듣기 싫어하는 저를 보면서 느꼈죠. ‘아 나는 사표를 써야겠다.’ 다음날 회사를 가서 바로 사표를 썼어요.” ◇창업을 준비하다 2013년 말, 회사를 그만둔 박 대표는 여러 방면으로 창업을 준비했다. 친구와 함께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푸드트럭 사업에 뛰어들었다. 1년 동안 푸드트럭을 몰면서 음식을 팔아볼 생각이었다. 기간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준비 과정에만 참여하고 박 대표는 물러났다. 요리에는 흥미가 없었다. “일이 고돼도 재미가 있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푸드트럭은 저랑은 맞지 않았던 거죠. 친구는 본인이 요리한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 데에서 행복을 느끼는 데,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3개월 정도 같이 하고 저는 빠졌죠.” 숙박과 관련된 일도 동시에 진행했다. 당시 한창 뜨던 에어비앤비를 운영한 것이다. 사실 사업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용돈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보람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은 교육이었다. 창업 지식이 전무 한 박 대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SK플래닛에서 운영하는 T 아카데미 모바일 기획 과정에 지원했고, 면접까지 거쳐 합격했다. 3개월 코스였다. 홀딱 바나나의 초기 모델은 이 곳에서 탄생했다. 9년째 연애 중인 박 대표와 그의 남자친구. 남자친구와의 연애 기간 동안 겪은 권태기는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줬다. /사진제공=박민경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 홀딱 바나나의 아이디어는 박 대표 개인적인 경험에서 얻었다. 당시 박 대표는 연애 7년 차. 19살 때 처음 알게 된 남자친구와 대학교 2학년부터 연애를 시작해 만남을 이어왔다. 너무 긴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권태기가 찾아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이트 코스에서부터 잠자리까지. 처음에는 설레기만 했던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 버렸다. 남자친구가 선물을 사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가 났을 정도였다. “주변 친구들과 얘기를 해보면 다들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옆에서 누가 연애 팁이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권태기는 극복하고, 좋은 커플은 권태기가 오지 않을 수 있게끔 말이에요. 홀딱 바나나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3개월 교육 과정을 거쳐 홀딱 바나나는 많이 다듬어졌다. 커플 선물 추천 서비스에서 커플 간 성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는 방향으로 어플리케이션의 내용은 달라졌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사업적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은 분야였다. 위험성이 높은 만큼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선점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주변의 반응도 뜨거웠다. 한국여성벤처협회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에 발탁돼 정부 지원금 1억원을 타냈을 정도였다. 창업 아이템의 아이디어가 돼 준 남자친구와는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 옆에서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창업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홀딱 바나나는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가능성을 믿고 여러 군데서 투자가 이어진 덕분에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포함해 정직원만 4명이 됐다. 2017년 ‘홀딱 바나나’로 한 데 모인 창업 멤버들과의 단합대회 모습 . 창업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홀딱 바나나는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가능성을 믿고 여러 군데서 투자가 이어진 덕분에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포함해 정직원만 4명이 됐다. /사진제공=박민경 ◇더 ‘홀딱’ 바나나 지난 15일 홀라 컴퍼니는 홀딱 바나나 1.0 버전의 단점을 보완한 2.0 버전을 출시했다. 고객들이 더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게끔 만드는 데 사활을 걸었다. 준비 기간에 다른 곳에서 좋은 조건으로 제시해 온 이직 제의마저 뿌리치고 만든 모델이다. 다른 부차적인 서비스는 모두 버렸다. 커플 간 성관계를 더 재밌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조언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어플리케이션(안드로이드 제공)을 다운 받은 커플이 만나게 되면 미션이 자동으로 전달된다. 위치기반 기술을 이용하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션은 무작위로 결정된다. ‘뽀뽀하기’와 같은 간단한 것부터 19금(?) 내용까지 그 수위는 다양하다. “1.0 버전을 만들 때는 개발자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부족했어요. 2.0 버전은 다를 겁니다. 이제 본격적인 수익을 목표로 해야죠. 광고 뿐만 아니라, 캐릭터 판매와 콘텐츠 생산까지 수익 채널을 다양화할 생각이에요.” 먼 미래의 일이지만, 해외 진출도 생각하고 있다. 법인명을 홀라 컴퍼니라고 지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홀딱 바나나는 ‘홀딱 벗었다’, ‘홀딱 반했다’는 2가지 의미가 있어요. 이름 자체는 좋은데 해외에서는 못 알아 듣잖아요. ‘홀라(HOLLA)’는 영어로 ‘와!’라는 감탄사에요. 홀딱과 어울리는 데다 외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편할 것 같았죠. 많은 분들이 홀딱 바나나를 사랑해주셔서 해외까지 뻗어 나가는 게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정순구기자 soon9@sedaily.com 출처 : http://www.sedaily.com/NewsView/1OG0TWY5N7 서울경제 신문에서 대표님의 유년기 시절부터홀딱바나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배경에 대해서 잘 써주셨어요! 저희 홀딱바나나 자체가 대표님의 철학과 취향 등이 듬뿍 담겨서 만들어진 회사인 만큼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되면 회사에 대한 이해도도 무척 높아진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내용을 확인해주세요 :)